"일 잘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게 저를 천천히 무너뜨리는 이유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번아웃 이유를 찾아 인터넷을 뒤질 때마다 "과로", "워라밸 붕괴" 같은 말만 나왔는데, 정작 제 번아웃의 뿌리는 그 칭찬 자체였습니다.
직장에서의 저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마감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고, 야근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이런 건 노이반한테 맡기면 돼"라는 말을 들을 때 묘한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 뿌듯함이 어느 순간부터 두려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을, 저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아챘습니다.
18개월 전의 나는 이랬습니다
2022년 가을, 저는 팀 내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리를 꽤 단단히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하루 평균 11시간을 일했고, 주말에도 슬랙(Slack) 알림을 껐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팀 전체 프로젝트의 약 40%가 어떤 형태로든 제 손을 거쳤습니다.
문제는 그게 자랑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저는 그 상태가 '정상'이라고 믿었습니다. 더 정확히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자리를 잃을 것 같았습니다. 칭찬이 동기부여가 아니라 빚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거죠.
그 해 12월, 저는 연차 3일을 붙여 5일 휴가를 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쉬는 내내 일 생각이 떠나지 않았고, 첫날부터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몸은 제주도에 있었지만 머리는 여전히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그 순간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나, 좀 이상한 것 같다.'
왜 칭찬이 번아웃 오는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심리학에는 역할 융합(Role Fus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누구인가'가 완전히 합쳐져버리는 상태입니다.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이다"가 자기 정체성의 핵심이 되어버리면, 일을 잘 못하는 순간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붕괴'처럼 느껴집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자 Carol Dweck의 연구에 따르면, 결과에 대한 칭찬("잘했어")은 오히려 실패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정에 대한 칭찬("열심히 했네")과 달리, 결과 칭찬은 자신의 능력이 고정된 것이라는 믿음을 강화합니다. 저는 수년간 "결과물이 좋다"는 칭찬을 받아왔고, 어느새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면 내가 사라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2021)는 직장인 번아웃의 원인 중 하나로 "정체성 과부하(Identity Overload)"를 지목합니다. 일이 곧 자아인 사람일수록, 성과 압박이 심리적 소진으로 이어지는 속도가 2.3배 빠르다고 분석했습니다. 번아웃 오는 이유가 단순히 "일이 많아서"가 아닌 경우가 훨씬 많다는 거죠.
"일 잘한다는 칭찬은, 그 기대를 절대 배신하지 말라는 무언의 계약이었습니다."
저에게 칭찬은 '인정'이 아니라 일종의 확인 편향(Confirmation Bias)의 연료였습니다. 확인 편향이란,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해주는 증거만 수집하는 심리적 경향입니다.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이다"라는 믿음이 생기면, 칭찬을 받을 때마다 그 믿음이 더 단단해지고, 결국 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더욱 몰아붙이게 됩니다. 저는 딱 그 함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전환점: 무엇이 달라지기 시작했는가?
2023년 3월, 팀 프로젝트에서 처음으로 명백한 실수를 했습니다. 보고서 데이터를 잘못 분석해서 팀 전체가 반나절을 허비했습니다. 금액으로 따지면 약 200만 원 상당의 시간 손실이었습니다. 작은 실수였지만, 그날 밤 저는 잠을 거의 못 잤습니다.
단순한 죄책감이 아니었습니다. 공황에 가까웠습니다. 손이 떨렸고, 다음 날 출근하는 게 무서웠습니다. '이제 다들 나를 다르게 볼 것이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제가 얼마나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매달려 있었는지를 실감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언러닝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B-001 믿음("나는 완벽하게 마무리해야만 한다")을 해체하는 작업을 병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제 완벽주의의 뿌리가 '탁월함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공포'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저는 이전에 다재다능함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잘해야 한다"는 믿음이 실제로 어떻게 에너지를 갉아먹는지를 다룬 그 글을 쓰면서, 저는 제 직장 정체성 문제도 같은 구조임을 깨달았습니다. '많이'가 아니라 '제대로' — 그 단순한 전환을 받아들이는 데 6개월이 걸렸습니다.
구체적으로 달라진 것들 — 그리고 아직 남은 것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완전히 바뀌었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도 매달 1~2회는 "내가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불안이 올라옵니다. 하지만 그 불안이 저를 지배하는 시간이 확실히 줄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달라진 것들을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 퇴근 후 슬랙 확인 횟수: 하루 평균 12회 → 2회 이하 (약 83% 감소)
- 주말 업무 처리 비율: 거의 매주 → 한 달에 1회 미만
- "못 하겠다"고 말한 횟수: 6개월 동안 0회 → 지난 3개월 동안 7회
- 수면 시간: 평균 5.5시간 → 7시간대 (약 1.5시간 증가)
- 직접 경험한 것: 거절 이후 관계가 나빠진 경우는 7번 중 단 1번뿐이었습니다
숫자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내면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전의 저는 "저는 이 업무가 어렵습니다"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두려웠습니다. 그 말이 '일 잘하는 사람'의 가면을 벗기는 것 같았으니까요. 지금은 그 말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약간 떨리지만, 말할 수 있습니다.
"칭찬이 덫이 되지 않으려면,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지금 이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정체성과 행동을 분리하는 것 — 그게 언러닝의 핵심입니다."
아직 남은 것들도 솔직히 공유합니다. 저는 여전히 "잘 부탁드립니다"는 메일을 받으면 긴장합니다. 누군가의 기대를 감지하는 순간 자동으로 몸이 긴장하는 패턴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수년간 반복된 행동이 뇌에 자동 반응 경로로 새겨진 것 — 심리학에서 말하는 암묵적 기억(Implicit Memory)의 문제입니다.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자동 반응의 뿌리는, 한두 달의 언러닝으로 완전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는 지금도 조금씩 해체 중입니다.
비슷한 과정을 겪은 다른 독자분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실제 독자들의 언러닝 후기도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저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바로 해볼 수 있는 것: "나는 누구인가?" 점검 질문
다음 질문들에 솔직하게 답해보세요. 종이에 손으로 써보시면 더 효과적입니다.
- ① 직장에서의 나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3가지는 무엇인가?
- ② 그 단어들 중 어떤 것이 없어지면 '내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가?
- ③ 지난 한 달 동안, 일 외의 이유로 스스로를 칭찬한 적이 있는가?
- ④ 만약 오늘 갑자기 직장을 잃는다면, 나는 누구인가?
마지막 질문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게 바로 탐구할 지점입니다. 불편함은 언러닝이 필요한 곳을 정확히 가리킵니다. 저도 처음 이 질문을 마주했을 때 답을 쓰는 데 20분이 넘게 걸렸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혹시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일 잘한다"는 말이 어느 순간 짐처럼 느껴졌던 경험, 혹은 칭찬이 오히려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되었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제가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이 이야기가 저만의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6개월간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받은 메시지 중 약 30%가 "직장 정체성"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같은 감옥 안에 있었습니다.
댓글로, 혹은 언러닝 커뮤니티를 통해 여러분의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나도 그랬다"는 말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첫 번째 탈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비울 때 더 빨리, 더 깊이 비울 수 있습니다.
변화는 극적으로 오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 18개월이 걸렸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언러닝을 시작하기 전과 지금, 저는 분명히 다른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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